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문단 편집) === 1988년 === * 참가 대회: [[1988 서울 올림픽]] ||<:>{{{#e31837 '''번호'''}}}||<:>{{{#e31837 '''이름'''}}}||<:>{{{#e31837 '''포지션'''}}}||<:>{{{#e31837 '''신장'''}}}||<:>{{{#e31837 '''소속팀'''}}}|| || 4 || [[미치 리치몬드]] || G || 196cm || [[캔자스 주립대학교]] || || 5 || 찰스 스미스 || G || 185cm || [[조지타운 대학교]] || || 6 || 빔보 콜스 || G || 185cm || [[버지니아 공과대학교]] || || 7 || 허시 호킨스 || G || 191cm || 브래들리 대학교 || || 8 || 제프 그레이어 || G || 196cm ||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 || 9 || 찰스 D. 스미스 || F || 208cm || [[피츠버그 대학교]] || || 10 || 윌리 앤더슨 || G || 201cm || [[조지아 대학교]] || || 11 || [[스테이시 오그먼]] || F || 201cm || [[네바다 대학교 라스 베가스 캠퍼스]] || || 12 || 댄 멀리 || G / F || 198cm || 센트럴 미시간 대학교 || || 13 || 대니 매닝 || F || 208cm || [[캔자스 대학교]] || || 14 || J. R. 리드 || F || 208cm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 || 15 || [[데이비드 로빈슨]] || C || 216cm || [[미국해군사관학교]] || [[88 서울 올림픽]] 준결승에서 소련 농구 국가대표팀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소련 농구 국가대표팀에 우승을 넘겨준다. 이듬해인 1989년부터 프로 농구선수의 올림픽 출전이 허용되면서 그렇게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NBA]] 스타선수들로 구성된 드림팀이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1972년 뮌헨 올림픽때도 결승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진 적이 있는데,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오심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 당시 소련 농구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소련(러시아)의 시점에서 다룬 영화가 [[쓰리 세컨즈]]다. 사실 1988년의 패배가 뼈아팠던 이유는, 1972년 올림픽은 오심 때문에 금메달을 강탈당한 것나 마찬가지였던 반면에 이때는 변명의 여지 없이 실력으로 패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NCAA]]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팀은 성인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이 상당수 포함된 소련팀에 압도당했으며, 특히 슈퍼스타 [[아비다스 사보니스]]는 공수양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미국의 에이스 [[데이비드 로빈슨]]을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 이 경기에서 로빈슨은 19점 12리바운드 2블럭 2스틸을, 사보니스는 13점 13리바운드 1스틸 1블럭을 기록해 기록상으론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나이는 한살 차이에 불과해도) 소비에트 프로리그에서 1981년부터 뛰며 우승을 여러차례 거두고, 10대 시절부터 다양한 국제경험을 통해 1986년 [[FIBA]]월드컵(당시에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까지 이끌었던 사보니스가 훨씬 노련한 플레이어였기에 로빈슨을 상대로 우세하게 경기를 이끌어갔다.] 또 하나 뼈아팠던 점은 상대가 다름 아닌 소련이었다는 것. 1988년이면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고, 정치적 외교적 라이벌 관계만큼이나 스포츠에서도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소련에게 패한 것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이토록 뼈아픈 패배였기에, 초대 드림팀이 처음 소화한 공식대회인 1991년 팬아메리칸 대회에서 손쉽게 우승을 차지한 후 공동주장인 [[래리 버드]]는 "우리는 바르셀로나에 가서 금메달을 '''합당한''' 자리에 되돌려놓을 것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남긴다. 여담으로, 올림픽 기간 중 고조된 반미감정[* 메달 유망주로 꼽히던 복싱의 [[변정일(권투선수)|변정일]]이 석연치 않은 패배후 링에서 내려오지 않고 판정에 불복한 걸 [[NBC(미국 방송)|NBC]]에서 희화화해 보도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고, 이에 더해 대회 초반에 이미 일정을 끝낸 미국 수영대표팀이 서울 시내 모처에서 술을 마시다 만취상태로 기물을 파손하고 난동을 부린 사건까지 일어나서 올림픽 기간 중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때문에 이 경기 당시 잠실학생체육관을 가득 매웠던 한국관중들이 USSR을 연호하며 우방국인 미국 대신 적성국인 소련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8년이면 소련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개방을 외치던 시점이고 노태우 정부에서도 북방정책을 표방하며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 정상화에 나섰던 상황이라 한국에서 소련에 대한 국가 이미지가 예전보다는 좋아졌던 판국에 반미감정까지 맞물리면서 이런 모습이 나온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